The force that through the green fuse drives the flower / Drives my green age; that blasts the roots of trees / Is my destroyer. / And I am dumb to tell the crooked rose / My youth is bent by the same wintry fever….by Dylan Thomas
21세기가 코앞으로 다가오는 가운데 지구촌은 원클릭 세상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인터넷 보급이 인포메이션 슈퍼하이웨이를 타고 전세계로 퍼져나가면서 사람들의 생활도 인터넷 스피드 처럼 빠르게 변해갔다.
인터넷의 등장은 보다 다양한 컴퓨터 생활을 가져왔다. 업무와 생산을 위해 활용해오던 컴퓨터였지만 이제 엔터테인먼트 기능이 더 중요한게 부상했다. 음악은 물론 영화를 감상할 수도 있고 TV 수신카드만 꼽으면 좋아하는 드라마까지 시청할수있었다. 여기에 디지털 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고스란히 피씨에 담아둘수도 있었다.
죽어가는 회사를 살려놓은 스티브 잡스는 2000년이 다가오면서 보다 먼 미래를 내다보기 시작했다. 무엇인지 정확히 표현할 순 없어도 애플에서 무언가 미래를 위한 새로운 것을 내놓아야한다는 강박관념같은 것이었다. iMac 의 인기와 닷컴 버블 경제에 힘입어 애플주식은 그가 복귀할때보다 5배나 오른 80달러대로 올랐고 회사는 적자구조에서 탈피해 완전한 흑자기조를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절대 만족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끊임없이 일거릴 찾아나섰다. 영국의 심리학자 마이클 메코비는 잡스를 두고 “생산적인 나르시스트”(Productive Narcissist)의 전형이라고 부른다. 미국 대통령중 특히 버락 오바마, 빌 클린턴, 리처드 닉슨 등이 바로 이런 유형의 사람들이다.
이들의 특징은 결손가정의 성장기를 보낸다. 잡스의 경우 입양아로 정상적인 가정이 아니었다. 양부의 사랑을 듬뿍 받았지만 입양된 사실을 알게된 십대 잡스는 오랜시간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고민했다. 잡스가 20대초반 인도 여행을 통해 종교적 철학적 자아 고찰을 시도한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았다. 이런 고행을 통해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관이 정립되면서 사람들을 따르게 만드는 리더쉽을 갖추게 된 것이다.
또 생산적 나르시스트들은 교육과 권위를 무시한다. 잡스 역시 대학 중퇴자. 이들은 엘리트들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정규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는 이유 때문에 영원한 불암감을 갖게된다. 하지만 이런 불안감은 스스로를 담금질하는 모티브로 작용한다. 그래서 전문가보다 더 전문적인 식견을 갖추기 위해 노력한다. 잡스가 미니멀리스트적 심미주의에 빠져 자신만의 디자인세계를 구축하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테크놀러지 비젼을 제시한 것도 이런 심리적 배경을 갖고있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메코비 박사의 분석처럼 그는 새천년을 맞아 더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해 외로운 고민에 빠져있었다. 그림의 단초는 그가 사랑한 음악에서 시작됐다. 인터넷의 저변화는 Peer to Peer 사이트의 출현을 가져왔고 그중 냅스터(Napster)는 가장 유명했다.
냅스터는 회원들끼리 mp3 라는 압축방식을 이용한 음원파일을 주고받는 곳이었다. 한마디로 인터넷 불법다운로드의 시효인 셈이다. 냅스터 때문에 음반회사들이 하루아침에 망할정도였다. 노래 한 곡이래봤자 3-5메가바이트 사이즈의 파일로 전화모뎀 인터넷 스피드로도 얼마든지 다운받기 쉬운 일이었다. 넵스터는 결국 미국음반협회의 소송으로 문을 닫았다. 하지만 유사 사이트의 범람은 음반업계가 피할 수 없는 인터넷 세상의 그림자였다.
스티브 잡스는 밥 딜런과 비틀즈 등의 뮤지션들을 좋아하기로 유명했다. 그는 애플의 개발자들과 함께 디지털 음악 관련 브레인 스토밍에 들어갔다. 냅스터는 사라졌지만 당시 MP3 플레이어가 한국에서부터 개발돼 소니 워커맨(CD 플레이어) 시장을 빠르게 공략하고 있었다. 대다수가 디지털 노래 15곡 정도를 넣어둘 수 있는 작은 용량의 기기들이었고 쉽게 사용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또 브랜드가 다르면 디지털 음원을 담는 방법도 달라져야했다.
잡스는 사용하기 쉬운 iMac과 연동하는 MP3 플레이어를 꿈궜다. 그렇게해서 애플의 iMac이 디지털 엔터테인먼트의 중심으로 자리잡는 일종의 “디지털 허브”로서의 역할을 부여할 수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기존 MP3와는 전혀 다른 방식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던중 하드웨어 책임자였던 존 루빈스타인 부사장과 함께 맥월드 컨퍼런스 참가를 위해 일본 토쿄를 방문했다.
남는 시간을 쪼개 일본의 부품업체들을 시찰하던 루빈스타인은 토시바 엔지니어들로부터 초소형 하드디스크가 개발됐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당시 하드디스크는 2 종류가 있었다. 3.5인치 데스크톱용과 2.5인치 노트북용. 헌데 동전보다 좀더 큰 1.5인치짜리 초소형 하드디스크를 개발한 토시바는 이 신제품을 갖고 어디에 사용해야할지 모르겠다며 루빈스타인의 조언을 구한 것이다.
무릎을 친 루빈스타인은 곧바로 잡스가 머물고 있는 호텔로 달려가 “1천만달러의 예산만 배정해주면 이제 우리가 원하는 MP3 플레이어를 만들수있다”고 전했다. 잡스는 그자리에서 루빈스타인이 원하는 예산을 전격 승인했다.
루빈스타인은 토시바의 5기가바이트 짜리 초소형 절전형 1.5인치 하드디스크를 이용하면 누구도 넘볼수없는 MP3 플레이어를 만들수있다는 자신감에 차있었다. 이때 그는 Phillips와 출신의 토니 파델을 스카웃한다. 파델 역시 자신이 생각해오던 초소형 MP3 기기 디자인안을 갖고 팜스와 같은 다양한 제조사를 접촉했지만 누구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1천곡이나 담아둘 수 있는 MP3 플레이어”의 효율적인 프로그램과 기능 버튼 개발에 시간을 보내고 있었지만 적당한 묘안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수석디자이너 존 아이브가 잡스와의 독대를 청했다. 그는 잡스에게 바퀴모양의 버튼 조합을 이용하면 쉽고 빠르게 노래도 찾고 곧바로 전기능 플레이로 이어지는 혁신적인 디자인을 제시한다. 우리가 잘알고 있는 오리지널 iPod의 Wheel 버튼의 탄생이었다.
마지막 남은 것은 외형디자인이었다. 아이브는 이과정에서 애플의 MP3 플레이어는 최고의 순수함을 상징하는 하얀색이어야만한다고 고집했다. 또 적당한 무게감과 기기의 견고함을 손끝으로 느낄 수 있도록 스테인레스 케이스를 고안했다.
최근 출간된 월터 아이작스턴의 스티브 잡스 전기에 따르면 이 과정에서 개발자들이 프로토타입을 만들어왔을때 잡스는 더 작아져야한다고 고집했고 더 이상은 작게는 불가능하다는 반발에 직면했다. 잡스는 프로토타입을 어항속에 집어던지고 공기방울이 나타나는 것을 보여주면서 “저렇게 공기가 새나온다는 것은 그만큼 더 줄일 수 있다는 증거”라며 디자인팀을 돌려보냈고 한다.
마침내 2000년 겨울 애플은 iPod이란 이름의 MP3 플레이어를 출시한다. 애플의 신제품은 전혀 새로운게 아니었다. 아름답게 디자인됐고 1천곡 이상의 노래가 들어갈 수 있는 점만 빼면 다른 제품들과 똑같은 기능의 MP3 플레이어였다. 하지만 이 iPod 하나가 전세계 음반업계를 송두리채 바꿔놓을 기기란 것을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다. 잡스가 꿈꾸던 디지털 허브 혁명이 시작된 것이다.